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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 ‘예능공룡’으로 뜬 ‘국보급 센터’ 서장훈

“방송은 인생의 덤, 농구가 내 운명”

‘노력하는 거인’ 서장훈은 국내 프로농구를 평정했지만 “한 경기도 만족 못 한다”고 했다. 은퇴 후 방송인으로 변신해 ‘팩트 폭격’으로 독보적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글 정영재 중앙일보 스포츠전문기자 포토그래퍼 박종근 사진 J-Photo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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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분야에서 정상에 오른 인물이 다른 분야에서도 최고가 될 수 있 을까. 쉽지 않은 일이다. 같은 스포츠 영역이라 해도 슈퍼스타였던 선수가 감독이 된 뒤 ‘무능하다’ ‘팀을 말아먹었다’는 욕을 들으며 쓸쓸히 퇴장한 사례들이 꽤 있다. 그런 점에서 서장훈은 참으로 놀 랍게 변신에 성공한 사례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뛰어난 농구 선수였다. 40세에 코트를 떠난 뒤 방송인으로서 대단한 적응력을 보여줬다. 지금은 주(週) 6~7개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독보적인 존재 감을 과시하고 있다.  서장훈은 휘문중·고, 연세대를 졸업하고 1998년 프로농구 서울 SK 에 입단했다. 이후 2013년 부산 KT에서 은퇴하기까지 688경기에 출장해 1만3231득점(경기당 19.23점)을 기록했다. 프로농구(KBL) 통산 최다득점인데 2위 애런 헤인즈(1만381점), 3위 김주성(1만288 점), 4위 추승균(1만19점)을 멀찌감치 따돌린 독보적 1위다. 역대 리 바운드 1위도 서장훈(5235개)인데 이 또한 2위 김주성(4425개)과 격차가 크다. 자유투 득점은 서장훈과 애런 헤인즈가 2223개로 동 률 1위다.  더 놀라운 건 3점슛과 자유투 성공률이다. 207㎝의 압도적인 신장 을 갖고도 민첩하고 상황 판단이 빨랐던 서장훈은 슈팅마저 정확했 다. 그의 통산 3점슛 성공률은 전문 슈터를 능가하는 36.0%다. 키 큰 선수는 자유투가 부정확하기 마련인데 그의 자유투는 10개 중 8개 가까이 림을 갈랐다(성공률 76.9%). 한 마디로 서장훈은 키 크 고, 힘 좋고, 빠르고, 슈팅도 좋은 최고의 농구선수였다. 2002년 부 산 아시안게임 남자농구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서장훈은 미국프로 농구(NBA) 선수 출신 센터 야오밍을 끝까지 봉쇄해 대한민국에 금 메달을 안겼다.  

서장훈은 은퇴 후 예능에 입문, 5년여 만에 정상에 우뚝 섰다. 방송 초기에는 ‘무한도전’ ‘라디오 스타’ 등 인기 프로그램에 게스트로 출연했지만 농구 코트에서처럼 이내 주전 자리를 꿰찼다. 2017년  SBS 연예대상 쇼토크부문 최우수상을 받았고, 2018년 백상예술대 상에서 남자 예능상을 받았다.  

 


‘기존 방송인과 조금 다른 느낌’이 인기 이유 

스튜디오에서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그는 거의 웃지 않아 사진기자 를 진땀나게 했다. 1시간 정도 진행된 인터뷰에서도 그는 모든 질문 에 진지하게 대답했다. 답변을 하다가도 적절한 단어를 고르기 위해 한참을 생각했다.   


본인이 ‘잘 팔리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다른 이유보다는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난 것도 있고. 굳이 따지자면 기존에 방송을 해 왔던 분들과 조금 다른 느낌? 그런 것 때문이지 않을까 싶네요. 방송을 오래 하신 분들은 그 분들만의 습관이랄까 패턴 같은 게 있거든요. 저는 방송을 오래 하 지 않아서 그분들과는 생각하는 거나 말하는 게 다르기 때문이 아 닐까 싶네요.”
 

방송인으로서 어떤 색깔로 자리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까?
“그런 생각을 갖고 방송을 하지는 않습니다. 뭐가 되겠다, 뭘 해야 되 겠다, 내가 어떤 걸 이루겠다 하는 건 추호도 없어요. 제가 방송에 재 능이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이고요. 방 송 한지 만 6년 가까이 됐는데, 저도 그 전까지는 시청자였으니까 시 청자들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리려고 노력합니다.”
 

PD들이 본인에게 요구하는 캐릭터(거인, 건물주, 결벽증, 이혼남 등)가 썩 유쾌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텐데요.
“모든 게 다 편할 수는 없죠. 제 개인 얘기들 중에는 조심스러운 부 분도 있고. 그런데 방송도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농구처럼 팀플레이 나 마찬가진데 내가 원하는 것만 할 수는 없다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시대가 많이 바뀐 탓인지 그런 얘기들에 재미있다는 반응이 많 습니다. 불편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최대한 흐름을 깨지 않는 선에 서, 지나치지 않는 선에서 하려고 합니다.”
예능 PD들은 엄청나게 큰 키, 깔끔함을 넘어 결벽증에 가까운 습 관, 아나운서 오정연씨와의 짧은 결혼생활과 이혼, 시세 200억원대 건물주 같은 컨셉트나 캐릭터를 요구했다. 그는 썩 내켜하지 않으면 서도 지혜롭게 이를 잘 소화했고, 지금은 운동선수답지 않게 말을 조리 있게 하며 ‘팩트 폭격’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역할로 입지를 다 졌다.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조언을 하는 상담 선생님 이미지도 만들어 가고 있다.
 

최고의 농구선수였으니까 방송에서도 최고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겠죠.
“그렇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제 인생의 목표는 우리나라 최고의,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농구선수가 되는 거였습니다. 저는 40살이 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목표에 도달하려고 노력했고, 제가 평가할 부분이 아니어서 그게 됐는지 안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더 이상 물리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제 인생의 가장 큰 목표는 거기서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하는 일은 우연찮은 기회에 시작해 많은 분들한테 관심 받고 여기까지 왔죠. 이 일은 제 인생에 큰 행운이자, 제 인생에 덤이라고 생각합니다.”


청소년의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하는 역할도 하던데요.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없으니 간접 경험을 하든지 책이나 신문을 보든지 하는 노력을 합니까?
“제가 지금 방송을 할 수 있는 것도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갖고 책도 조금 더 접하고 그랬기 때문이 아닌가 싶고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 농구기계가 되는 걸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지식 을 쌓는 걸 신경 써 주신 부분도 있습니다. 중학생한테 얘기할 수 있 는 건, 중학생 아이가 없어도 제가 중학생이었던 때가 있었으니까요. 운동을 계속 해 왔지만 제 나이또래 다른 사람에 비해 다양한 경험 을 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제가 아는 선에서 경험을 들려주는 거 죠. 제 얘기가 다 맞는 건 아니고, 또 예능이기 때문에 무슨 강의를 하는 건 아니죠.”
 

초등학교 때 야구를 시작했다가 중1 때 농구로 바꿨는데요. 야구를 계속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렇게 좋은 선수가 되진 못했을 겁니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죠. 어떤 종목이든 잘 하려면 특출한 감각이 있 어야 하는데, 저는 공을 잘 갖고 놀긴 했지만 야구에 적합한 신체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농구로 바꾼 게 새로운 인생의 찬스가 됐죠. 저는 중1 중간부터 농구를 시작해 다른 아이들보다 3~4년이 늦었잖 아요. 따라가기 힘들었고, 굉장히 떨어지는 선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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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서장훈은 연대 최희암 감독님 덕분
늦게 농구를 시작했고 주전으로 뛰지도 못해서 더 열심히 개인연습을 했다고 하던데요.
“그땐 대학을 갈 수 있을까 고민했고, 팀에서 주목을 받는 선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어요. 그렇다고 농구에 아주 엄청난 흥미를 느낀 것도 아니었어요.”
 

휘문중·고 1년 후배인 현주엽(프로농구 창원 LG 감독)과는 어떤 사이인가요. 라이벌이라고 해도 될까요? 

“그 친구도 늦게 농구를 시작해 각광받고 촉망받는 선수는 아니었 어요. 처음에는 저 같은 입장이었죠. 라이벌이라기보다는 제 농구 인생의 동반자라고 생각합니다. 시합 때는 상대를 이기기 위해 열심 히 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지기도 하지만 코트 밖으로 나오면 어릴 때부터 같이 농구했고 국가대표팀에서도 합숙생활을 했기 때문에 친하게 지내죠.” 남들보다 늦게 농구를 시작해 주전에도 끼지 못하던 서장훈은 꾸 준한 연습으로 앞서 출발한 동료와의 격차를 줄였다. 중3 때 15㎝가 크면서 197㎝의 압도적인 하드웨어를 가진 ‘공룡센터’로서 주위의 기대를 모았다. 1년 후배 현주엽과 함께 휘문고 전성시대를 열었고, 1993년 연세대에 입학해 ‘신촌 독수리 황금기’의 정점을 찍었다. “서 장훈과 맞붙고 싶어 고대를 간다”며 안암골에 둥지를 튼 현주엽과 는 대학 시절 내내 불꽃 튀는 명승부를 펼쳤다.
 

연세대로 진학하면서 농구 인생의 꽃을 피웠는데요. 원래 연세대를 가려고 했습니까?
“여러 학교에서 제의가 있었고, 특히 연대와 고대에서 강하게 스카 우트 경쟁을 했죠. 당시 연대에서 뛰던 형들이 저랑 조금 더 가까웠 던 것 같아요. 특히 이상민(서울 삼성 감독) 형이 집도 가까웠고 자 주 봤던 터라 상민이 형이랑 같이 뛰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요. 또 연대가 성적은 좋았지만 키 큰 정통 센터가 없었으니까 제가 들어가면 팀에 잘 맞겠다 싶었어요.”
 

당시 연세대를 이끌던 ‘독종’ 최희암 감독과의 에피소드도 많죠? 체벌도 좀 있었다고 하던데요.
“당시는 학생이었고 지금보다 훨씬 운동 많이 할 때니까 힘든 부분 도 있었죠. 그렇지만 최 감독님은 다른 분들보다 조금은 더 앞서 나 가신 분임은 확실합니다. 4년 내내 늘 힘들지 않고 편하기만 할 수는 없고요. 저희 성적이 좋았고, 어찌 됐든 제가 연대를 가서 최 감독님 밑에서 배웠기 때문에 오늘날의 서장훈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 니다.”


당시 연세대 농구팀 인기가 거의 아이돌 스타급이었죠. 체육관과 숙소까지 꽃다발과 선물을 든 여학생들이 몰려들었는데요. 왜 그랬을까요?
“저를 제외하고 나머지 같이 뛰었던 형들(문경은·이상민·우지원·김 훈 등)이 그 당시로 보면 굉장히 미남들이었잖아요. 여자 중고생들 이 지금처럼 스트레스 풀 창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우연찮은 기회 에 우리를 보게 되고, 인물 좋은 우리 형님들한테 빠져서 체육관 와 서 소리도 지르고 스트레스 풀고 그랬죠. 드라마 <마지막 승부>, 만 화 <슬램덩크>의 인기와도 맞물려서 농구가 가장 핫한 종목이었고, 저희 성적이 좋아서 TV에도 자주 나오니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운이 좋았죠.”
연세대는 1993년 9월 농구대잔치에서 대학 팀 최초로 우승을 차지 한다. 서장훈은 당대 최강 골밑 라인이었던 한기범(207㎝)-김유택 (197㎝)이 버틴 기아자동차를 혼자서 무력화시켰다. 94·95 농구대 잔치에서도 독주한 연세대는 1번 시드를 받아 8번 시드인 삼성전자 와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그 경기에서 삼성전자 센터 박상관·이창수 등이 폭행에 가까운 반칙으로 서장훈을 괴롭혔고, 급기야 서장훈은 코트에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기에 이른다. 삼성전자는 서장훈이 빠 진 연세대를 꺾고 결승에 오르지만 팬들의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서장훈은 국내 코트에 환멸을 느껴 미국 샌호제이주립대로 유학을 떠난다.
다.
 

 

실패한 미국 유학에서 인생을 배웠다
당시 실업팀 선배들의 견제가 상식을 넘어선 수준이었는데요.
“그때는 섭섭하기도 하고 화도 났는데, 그분들로서도 자신들이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해 수행하려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나중에는 같 은 선수로서 이해하게 됐어요. 그분들 입장 생각하면 또 얼마나 이 기고 싶었고, 나를 막고 싶었을까요.”
 

미국 유학은 결국 실패로 끝났고, 1년 만에 국내로 돌아왔죠. 

“원래 미국 가서 뛰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그 사건을 계기로 한번 가보면 어떨까 싶어서 갔는데 정보가 너무 어두운 시절이어서 정확하지 않은 루트를 개척하려 했던 게 실패의 원인이었죠. 그 팀이 딱히 비전 있는 팀도 아니었고, 선수로 뛸 수 있는 규정과 절차도 복 잡했어요. 결국 1년 있다가 돌아왔는데, 허송세월은 아니었던 것 같습 니다. 농구 기량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인간적으로 많이 성숙해졌죠.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혼자서 생활하다 보니 스스로 성찰할 기회도 생겼고, 인간적으로 성숙해진 게 제 인생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국내 복귀 후에도 여전히 집중 견제에 시달렸고, 프로 와서도 목 보호대를 해야 할 정도가 됐죠. 그래서 심판한테 과도하게 항의하고 인상 찌푸리는 선수로 이미지가 굳어졌잖아요. 많이 억울했을 것 같은데요.
“제가 그나마 40세까지 뛸 수 있었던 건 경기를 잘 하고 반드시 이기 겠다는 근성 때문이었습니다. 매 게임 전쟁처럼 생각하고 뛰다 보니 까 과도한 파울에 대한 항의나 액션 같은 게 나왔고, 저도 사실 인간 적으로 덜 성숙했고요. 국내엔 그렇게 심판에게 강하게 나오는 선수 가 없고 팬들이 그런 모습을 안 좋아하니까 좀 부정적인, 부정적인 거라기보다는…(이 대목에서 그는 적확한 표현을 찾기 위해 한참 뜸 을 들였다) 늘 항의하고 화내고 이런 이미지로 보신 것 같아요. 제가 갖고 있는 철학은 ‘농구는 쇼나 예능이 아니다. 최선을 다해 이기려 고 노력을 하는 게 최고의 팬 서비스’라는 겁니다.”
 

어떤 인터뷰에서 보니까 ‘단 한 경기도 스스로 만족한 경기가 없었다’고 했는데 사실입니까?
“사실입니다. 작은 성공에 도취하고 과하게 기뻐하면 발전이 없다는 생각을 했고, 어쩌든지 자신에게 냉정해지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더 넣고 더 잘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까 기뻐하려고 하지 않았죠. 그랬 기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도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선수 생활 중에서 가장 황홀했던 순간, 혹은 최고의 골은? “그렇게 기쁘고 좋았던 기억은 많지 않고, 오히려 농구를 잘 못했던 때인 중2 첫 경기 뛰면서 첫 골 넣었을 때가 기억납니다. 최고의 골이 라기보다는 가장 기분이 좋았던 골이었죠. 인생 최고의 골은, 워낙 많은 골을 넣어서, 하나만 꼽기가 어렵네요.”
 

프로에서는 6팀(SK-삼성-KCC-전자랜드-LG-KT)을 옮겨다녔는데요.
‘내 마음의 팀’이라고 꼽을 수 있는 팀은?

“모든 팀에서 최선을 다해 뛰었기 때문에 ‘이 팀이 내 마음의 팀이다’ 할 수는 없어요. 모든 기억은 소중하니까요. 제가 다른 선수에 비해 서 팀을 많이 옮겼는데 그때는 철저하게 프로페셔널 마인드로 했기 때문이죠. 프로는 하는 만큼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농구는 문화다, 성적에 연연하면 팬들 떠난다 서장훈이 떠난 뒤 프로농구에 토종 스타가 보이지 않는다는 한탄이 깊다. 대학 무대를 ‘씹어 먹는다’고 했던 선수들도 프로에 오면 경기 뛸 기회를 잡기도 힘들다. 국내 장신 선수 중 서장훈처럼 외국인 선 수와 1대1로 맞설 만한 하드웨어나 기술을 갖춘 선수가 없다. 토종 스타를 보기 힘든 프로농구가 팬들의 눈길을 잡기 어려운 건 당연 하다.  

많은 콘텐트와 농구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고, 한국에서 어느 정 도 자리 잡은 프로야구를 빼고는 대다수 종목이 갖는 고민이라고 봅니다. 이젠 생각을 좀 바꿔서 문화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경기력 도 중요하지만 관중이 소중한 시간에 돈 내고 와서 충분히 즐길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직도 기업들이 프로농구 팀을 운 영하니까 당장 성적에 급급하고, 이기는 것에 목숨 거니까 대중의 생각과 괴리가 있는 거죠.”
 

프로농구판은 외국인 용병이 점령한 지 오래 됐습니다. 화려한 장면은 용병이 독식하고 국내 선수는 ‘용병 도우미’ 역할에 그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많습니다.
“갖고 있는 실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모든 팀이 성적을 최우선으 로 하기 때문에 국내 선수가 좀 더 오래 출전하고 비중이 커질 수 있 는 분위기 자체가 형성 안 되는 겁니다. 이런 점들이 결국 농구가 경 쟁력을 잃는 요인이 되죠.”
 

국내 농구가 살아나려면 국가대표팀이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줘야 하는 것 아닐까요?
“그건 한계가 있습니다.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우리가 극적 으로 중국을 꺾고 우승했는데 그 후 프로농구 인기가 올라갔나요?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이란을 결승에서 이겼지만 프로농 구 인기는 더 떨어졌어요. 농구라는 종목의 특성상 우리가 국제대회 에서 성적 낼 수 있는 최대치가 아시안게임 우승입니다. 그 최대치를 냈는데도 농구 인기가 안 올라간다면 생각을 바꿔야죠.”


농구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는 뜻을 계속 밝혀왔는데요. 지도자로 코트에 복귀할 생각은 없는지요?
“저는 30년 가까이 농구를 한 사람이고 지금도 농구인입니다. 농구 를 했던 사람이 다른 일 하면 그때부터 농구인 아닌 건 아니잖아요. 모든 농구 선수가 은퇴 후 감독 코치를 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습 니다. 정말 의욕을 갖고 감독 하고 싶은 선후배들이 너무 많죠. 과연 내가 그 정도 열정으로 할 수 있을까도 생각할 문제고. 평생 농구를 했으니 농구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갖고 어떤 방식으로든 농구에 기여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또 그렇게 실천할 거구요.”
 

 

유행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는 자신 삶의 투영
‘공부하는 학생 선수’가 화두가 되고 있습니다. 공부도 하면서 운동을 잘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어린 선수들이 아주 일찍부터 엘리트로 갈 거냐, 아니 면 운동을 관둘 거냐의 선택을 강요받습니다. 외국은 엘리트와 생 활체육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학교 체육이 그 모든 것을 합쳐서 가고 있어요. 잘하는 선수들만 직업 선수로 가고 나머지 선수들은 원래 생활로 돌아갈 수 있는데 우리는 그런 분위기가 아니죠. 중요 한 건 본인의 의지와 부모의 방침입니다. 학교 수업을 완벽하게 못 따라간다면 관심 있는 분야에 대해서 책을 좀 더 보게 하든지 해야 지, 운동에만 모든 포커스를 맞추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 니다.”
 

어떤 사람이 레전드일까요? 
“제가 정말 레전드라는 얘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진정한 레전드는 그 분야에서 아주 좋은 성적을 거뒀다거나 뛰어난 기량을 보여줬다거나 하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선수로서는 너무나 훌륭하지만 실제로 만났을 때 실망한 경우도 있어요. 선수 로서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는 실력과 커리어를 보여줘야 하고, 그 정 도 스타라면 거기 걸맞은 인성과 삶의 태도도 겸비해야 한다고 봅 니다.”
 

사람들은 레전드에게 공익적 역할을 기대합니다. 타 종목 레전드들이 재단을 설립한 경우가 많은데요. 
“많은 분들이 재단을 만들어 좋은 일들을 하고 있는데, 제 철학과 는 조금 다릅니다. 제 입으로 기부 얘기하기가 좀 그런데, 사회적인 약자에 대한 관심을 좀 가지려고, 계속 노력하려고 있습니다. 부족 하지만 대중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았으니까 어느 정도 보답하는 건 사회적인 일들에 관심 갖는 거고,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려 고 계획 중입니다.”
인터뷰 중에 서장훈이 가장 많이 쓴 단어가 ‘생각’이었다. 그의 생각 은 ‘의미’를 찾는 과정이었다. 그의 유행어 “그게 무슨 의미가 있니” 는 어쩌면 서장훈 자신 삶의 투영일지도 모른다. ‘의미’보다는 ‘재미’ 를 앞세우는 스포츠와 연예계에서 그의 존재감이 돋보이는 이유다.  농구 코트에서 ‘공룡센터’, 방송가에서 ‘예능공룡’으로 불린 서장훈 에게 ‘개념공룡’이라는 별명을 하나 더 붙여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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